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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국왕의 책무는 ‘숨은 고객’을 찾아 감동시키는 것

매달 민생문제 경청… 지방수령들 마음 움직인 ‘겸손 리더십’

 

‘기업 CEO의 고객이 사실 소비자가 아니듯, 왕의 고객은 백성이 아니다.’

이번 주말에 출간될 새 책 ‘세종학 개론’을 탈고하면서 든 생각이다. 세종의 국가경영 전반을 입체적으로 살피고, 인접 학문들(역사학·인물전기·정치학)과 세종학을 비교하면서 세종실록을 다시 읽다 보니, 여름방학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것은 ‘왕의 숨은 고객’이다. 물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이나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처럼 겉으로 드러난 고객이 중요하다. 하지만 백성과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만족시키고 감동시킬 ‘숨은’ 고객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급 직원과 지방 수령이다.

세종은 발령받고 임지로 떠나는 수령들을 꼭 불러서 만나보곤(引見) 했다. 왕이 아무리 백성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펼치려 해도, 그 선정 의지를 현지에서 구현하는 사람은 수령들이다. 세종은 즉위 초 변계량이 했던 말, 즉 “백성을 구원하는 요령은 사람됨을 잘 알고 쓰는 데 있다”는 말을 받아들여서 매월 1회가량 수령을 인견했다(총 392회). 그런데 세종이 수령을 만나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이 독특했다.

우선 하루에 만나는 수령의 수를 5인 이하로 한정했다. 너무 많은 인원을 만나 형식적인 당부 말씀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대는 내 곁에서 사관(史官)으로 일했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내 마음을 알 것이다. 부디 현지에 가서 백성이 그 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실천해 달라”며 세종은 개인적 친밀감에 호소하기도 했다. 북쪽 변방으로 가는 수령일 경우 “고향의 부모님은 내가 잘 돌볼 것이니 염려 말고 백성으로 하여금 생업에 즐겁게 종사하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둘째, 수령의 위상과 책무를 분명히 일깨워 줬다. 세종에 따르면 “지금의 수령은 곧 예전의 제후(諸侯)”였다. 천자로부터 각 지역을 분봉(分封)받아 실질적으로 다스리던 제후와 마찬가지로, 수령은 그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라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수령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백성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만큼 백성의 입장에 서서 민생을 보살피고 형벌을 시행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또한 “수령이 할 일은 많지만 그 요체는 백성으로 하여금 각기 그 생업을 얻게 하는 것(各得其所)”이라면서, 생생지락(生生之樂)의 나라, 각자 일터에서 신명 나게 일하는 국가를 만드는 게 왕과 수령의 가장 중요한 책무임을 강조했다.

 

셋째, 수령이 다스릴 지역의 당면 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눴다. 가령 평안도로 떠나는 수령에게 “그 지역은 지금 사신을 접대하느라고 폐해가 매우 커서 백성이 소요(騷擾)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을 더욱 어루만지고, 백성에게 어떤 혜택을 베풀지 깊이 생각하라”고 말했다. 충청도 수령에게는 “그곳이 지난해 농사가 잘되지 않아서 백성이 먹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민생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이에 비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령에게는 “전라도에 풍년이 들어 곡식이 잘됐으므로, 나라에서 떠도는 백성 중 그리로 가는 자가 많다. 그러니 그대는 임지(任地)로 가서 그들을 굶지 않게 하면서도 다시 원기를 회복해 고향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수령을 만날 때 세종이 하는 말이 있다. “부족한 내가 왕이 돼서 백성의 삶이 고달프다”는 자기 겸손의 말이다. “근래에 홍수와 가뭄이 잇따라 일어나서 아침저녁으로 걱정하며 두렵다”면서 제발 위기를 넘기게 할 방안을 말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인재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최고의 방법은 스스로를 낮춰 경청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겸손과 경청의 자세가 수령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옷깃에 새겨놓고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게 만들었다. 왕의 진정한 고객인 수령을 움직였던 세종의 리더십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28010324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