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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최고의 협상 무기는 지도자의 진실함이다

신하의 말 존중했으나 ‘대의’ 위해선 쇠·돌같이 돌파력 보여

 

“내가 여러 가지 일에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좇지 않고, 대의(大意)를 가지고 강행한 적이 자못 많다.”

흔히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존중해 잘 따른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 속 세종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존중했으나 그저 고분고분하기만 한 임금은 아니었다. 재위 중반에 장수와 재상들이 다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토론과 설득을 통해 파저강의 여진족을 토벌했다. 공무원 장기근무제(수령육기제 개혁), 북방 영토경영(양계축성), 관료제의 탄력적 운영(행수법)은 세종 스스로 밝힌 ‘독단 결정’의 예다.

재위 후반부 ‘평양 대성산 떼강도 사건’은 세종의 “쇠와 돌같이 굳건한” 의지와 돌파력을 잘 보여준다. 1447년(세종 29년) 2월, 평양의 감옥에 갇혀 있던 20여 명의 무장한 떼강도가 아전과 관노의 도움을 얻어 집단 탈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몇 년째 계속되는 흉년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대성산에 웅거하고 있는 것을, 조정에서 거듭 명령해 체포한 지 1년 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형조 관리의 보고를 보면 도적 떼의 일부는 도망했거나 탈옥 중에 사망했으며, 붙잡힌 13인은 파옥(破獄)에 관여하거나 동조했음을 자백했다.

평양의 아전 손효숭이 많은 뇌물을 받고 도적 떼에게 정보를 제공한 사실도 드러났다. 조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도망가다 잡힌 나이 어린 죄수의 처결 문제였다. 형을 따라 입산했다가 도적의 무리가 된 13세의 이영산, 18세의 김춘과 은산에 대해서는 특별히 참형을 면해주면 어떻겠느냐고 세종이 제안했기 때문이다.

 

조정의 관리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악한 짓은 꼭 장년이 아니어도 저지르며, 13세나 15세 때 사람을 죽이고 처형된 경우가 있으니, 모두 법대로 처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 번이나 거듭된 요청에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형조에서 ‘강도(强盜)’라는 두 글자를 얼굴에 자자(刺字·문신)한 후 섬으로 유배 보내자는 타협안을 내놨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반대했다. “만약 나이가 어리다 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면, 후일에 이 점을 이용해 나이를 줄여서 살기를 꾀하는 자들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는 게 그 반대 이유였다. 공무원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애용하는 ‘발생 가능한 위험’을 들어 왕을 압박한 것이다.


영의정 황희까지도 “이번 강도들은 병장기까지 갖춘 반국가단체(草賊)인 만큼 감형(減刑)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마지못해 “법대로 하라(참형)”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곧 “이제 다시 생각한즉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면서 사형 집행을 거절했다. 그때 의정부 관리가 아주 그럴싸한 제안을 했다. 평안도에 두 개의 명령, 즉 죄수들을 모두 법대로 처형하라는 명령과 나이 어린 이영산 등은 사면해주라는 명령을 순차적으로 내리라는 제안이었다.

그러면 자기들이 참형을 집행한 뒤에 왕의 사면령이 도달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전하의 살리기 좋아하시는 덕을 백성들이 알게 될 것이고, 법도 또한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는, 어찌 보면 매우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세종의 판단은 달랐다. “임금인 내가 아랫사람들을 그렇게 교묘하게 속여서야 되겠는가(其巧)”(세종실록 29년 5월 12일)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백성들은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랏일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귀신같이 꿰뚫고 있는데(至愚神明), 그렇게 공교롭게 속여서 인심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게 세종의 거절 이유였다. 백성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세종의 진실된 언행이야말로 신하들의 거센 반대와 교묘한 제안을 이겨낸 최고의 협상 무기였다. (이영산 등은 결국 살아났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21010324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