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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일 간 외교 분쟁 해결한 세종시대 인물들

“팔만대장경 안 주면 침공” 日 협박에도… 국가 간 신뢰 강조한 외교

 

‘상상력의 빈곤.’ 영화 ‘나랏말싸미’를 본 후 든 소감이다. 창작물인 영화를 두고 역사 왜곡이니 세종 폄훼니 비판하는 자체가 난센스다. 따라서 온전히 역사적 상상력 자체에 집중해서 봤다. 결과는 실망 그 자체다. 한글 창제에 대한 해석이나 배우의 연기 문제가 아니다. 그 많은 인력과 예산을 들여 고작 그 정도에 그쳤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영화감독이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흉내를 낸 것이 첫 번째 실패 이유다. 어차피 새로울 것 없는 세종과 한글 창제에 관한 것이니, 지난번 영화 ‘사도’처럼, 제작팀이 열심히 공부해서 각색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첫 장면부터 익숙한, 전혀 새롭지 않은 스토리들이 자주 등장했다. SBS 사극 ‘뿌리깊은 나무’의 불교 버전을 보는 듯도 했다. 특정 종교의 관점이 투영된 것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두 번째 실패 이유인 빈곤한 상상력이 문제였다. 영화 ‘신과 함께’는 다분히 특정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종교영화라고 시비 걸지 않는다. 종교 시비를 훨씬 뛰어넘는 문학적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대안은 분명히 있었다. 감독이 만약 세종처럼, 상상력 뛰어난 대본(인재)을 찾아내는 데 온 마음을 기울였다면 어찌 됐을까?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의적 회의(경연)를 통해 집단지혜를 발휘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한·일 사이에 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대장경 위기’를 다룬 것은 그나마 신선했다. 1422년 겨울에 일본 사신들은 세종에게 팔만대장경의 원판을 달라고 강청했다. 그 이전 임금인 정종 때 이미 주기로 약속한 것이며, 자국의 태후가 간절히 원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들 중 일부는 “경판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여기서 굶어 죽겠다”며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병선 수천 척을 보내 약탈하겠다”면서 위협하는 자도 있었다. 세종은 마치 철부지 대하듯 그들을 달래고 가르치면서 - 영화 내용과 달리 - 팔만대장경판 대신 화엄경판 등을 줬다.

 

사건은 2년 뒤인 1424년에 터졌다. 일본 정부는 우리 사신들을 시모노세키(赤間關=下關)에 55일간이나 구류해 놓은 채 팔만대장경판을 주지 않으면 무장한 배 100여 척으로 조선을 침공하겠다고 협박했다. 자칫 목숨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사신 박안신과 이예는 오히려 그들의 무례를 꾸짖으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하늘의 도(天道)는 정성으로써 만물을 이뤄지게 하고, 사람의 도(人道)는 신의로써 여러 가지 행실을 서게 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 나라와 교제할 때 정성을 다하고 서로 속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귀국이 지금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고, 명일에 우리나라가 귀국의 신하를 또 그렇게 대접한다면 장차 양국의 관계가 어찌 되겠는가.”

하늘과 사람의 도리를 들어 외교의 핵심 덕목이 정성과 신뢰임을 강조한 다음, 지금 일본의 조치가 장차 양국 간의 큰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피하기만 하던 일본 쪽에서 답신을 보내왔다. “이제 귀하의 편지를 보니 말이 대단히 적절하다”면서 우리의 예물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자칫 심각한 분쟁으로 치달을 뻔했던 ‘대장경 위기’는 이렇게 해결됐다.

요즘 한·일 관계가 악화되자 ‘일본 지인’이나 ‘미국 정부 소식통’을 들먹이며 그 원인을 분석하는 이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말(馬)이 죽게 된 원인을 이모저모로 설명하거나 그 책임을 떠넘기는 사의(死醫)가 아니다. 그보다는 죽어가는 말을 살려낼 해법을 제시하는 생의(生醫), 즉 양국 사이의 신뢰를 다시 회복시킬 실천적 지식인이 필요하다. 창의력과 설득력을 겸비했던 세종 시대 외교 인물들이 더욱 그리워지는 나날이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807010324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