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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협상가 세종, 왕비의 모친을 상봉케 하다

소헌왕후가 ‘역적’이 된 친정어머니 만날 수 있도록 신하들 설득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 물론 큰일이다. 하지만 집안 다스리는 일이 제일 어렵다(齊家最難).”

가정경영이 제일 어렵다는 세종의 이 어록만큼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말은 없는 듯하다. 남녀와 세대를 떠나 심지어 청소년들까지도 가족 간 화합이 어렵다는 데 깊이 공감했다. 이 점에서 더욱 궁금해지는 것이 세종의 가정경영이다. 세종은 어떻게 후궁을 8명이나 뒀으면서도 가정불화 없이 평생 아내의 존경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을까?

그 일차적인 이유는 왕비인 소헌왕후의 인품이다. 세종에 따르면 그녀는 “남편을 의심하거나 후궁들에 대해 투기하지 않았다(無所疑忌)”고 한다. 심지어 “후궁 중에 왕이 총애하는 이가 있으면 더욱 융성한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소헌왕후의 초인적인 “자기 절제력(自飭)”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다. 세종의 아내 사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내를 칭찬하고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세심히 배려했다. 음악공연은 세종이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자주 준비한 선물이었다.

1443년(세종 25) 3월 세종은 왕비와 함께 온양 온천으로 가는 길에 지친 일행을 위해 즉석 공연을 베풀었다. 지금의 용인시 수지 풍덕천(刀川) 근처에서 악공 15인에게 밤늦게까지 연주하게 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봄날의 들녘에서 왕비와 신하, 백성들까지 함께 즐기는 여민락(與民樂) 콘서트를 연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왕비를 위한 콘서트를 모두가 좋게 본 것만은 아니었다.

강원도 이천(伊川) 행차 때 세종은 호위군사들의 소음을 줄이기 위해 왕비의 천막 근처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러자 언관들은 궁궐도 아닌 야외 행궁(行宮)에서 왕비를 위해 밤늦게까지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따졌다. 이처럼 왕비를 기쁘게 하는 일은 깐깐한 신하들의 반대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왕비로 하여금 죄인 신분의 친정어머니를 만나게 하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재위 6년째인 1424년 11월 세종은 유정현 등 여러 정승을 불러 여흥부원군 민제 이야기를 꺼냈다. “나의 외조부 민제의 네 아들이 모두 죄인으로 죽어 제사 지낼 사람이 없으니 민무구의 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죄는 죄대로 주고 선세(先世)를 위해 후손을 세워주어야 한다”면서 세종의 말에 찬성했다. 세종은 이어서 “이미 사망한 심덕부의 경우는 어떤가”라고 물었다. 왕비의 친정아버지 심온의 형제가 ‘강상인 옥사’ 때 모두 사망해 왕비의 할아버지 심덕부를 제사 지낼 사람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신하들은 “심 씨는 죄가 중하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반대했다. 민제의 경우와 비교하면 공평하지 않다고 반박할 수 있었는데, 세종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중궁의 모친이 지척에 있으면서 서로 보지 못한 지 벌써 7년”이라면서 “모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그 어미로 하여금 궁궐에 들어와 보게 할 수는 없으나, 중궁이 궐 밖으로 나가서 서로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신하들은 “왕비를 죄인과 만나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종은 “중궁이 어려서부터 외조부 안천보의 집에서 자라서 은의가 지극히 두텁다. 지금 안천보가 나이가 많이 들어 중궁을 보고 싶어 하니, 중궁으로 하여금 그 집에 나가서 보게 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물었다. 신하들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서 세종은 “그리고 그 집으로 중궁이 가서 외조부도 만나고 어머니 안 씨도 만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거듭 제안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모두 “그렇게 하면 가하다”고 대답했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 다음 상대방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세종의 협상 역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731010326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