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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국제전으로서 임진왜란 국제전으로서 임진왜란 - 임진왜란(1592.4-1598.11) : 일본에서는 ‘분로꾸 게이쪼오(文祿․慶長)의 役’이라 불리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 또는 ‘항왜원조(抗倭援助)’이라 불림. - 조선왕조 역사상 최대의 국난일 뿐만 아니라, 당시 동북아의 조선․명․일본 3국간의 국제적 전쟁이기도 했음(손종성 1990, 171). -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의 국내정치는 물론이고, 동북아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음. 우선 조선은 전란의 와중에서 노정된 위정자들의 무능과 심각한 민심이반 현상, 그리고 신분 및 조세체제의 와해 등으로 체제쇠퇴의 징후를 드러냈음. - 명 역시 임진왜란 참전에 소요된 막대한 재정적 부담으로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며(John K. Fairbank 1991,.. 더보기
이순신의 리더십 : 승리의 요인들 이순신의 리더십 : 승리의 요인들 그러면 그처럼 기강이 무너지고, 허술한 방비상태였던 조선수군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인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함대의 수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가 “나를 넬슨에 비교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고, 세계 해전사(海戰史) 전문가 발라드(G.A.Ballard, 1862-1948) 제독이 “어떠한 전투에서도 그가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고 극찬했던 이순신의 군사리더십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는 사관(史官)의 말처럼( 더보기
이순신의 자기 절제력 이순신의 자기절제력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매양 군량 때문에 걱정하여 백성들을 모아 둔전을 짓게 하고, 사람을 시켜 고기를 잡게 하며, 소금 굽고 질그릇 만드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 하는 일이 없었고, 그것을 모두 배로 실어 내어 판매하여 몇 달이 채 안 되어 곡식 수만 석을 쌓게 되었다. 또 공은 진중에 있는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매일 밤 잘 때도 띠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겨우 한 두 잠 자고 나서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날이 샐 때까지 의논하고 또 먹는 것이라고는 아침, 저녁 5, 6합 뿐이라 보는 이들이 공의 먹는 것 없이 일에 분주한 것을 깊이 걱정하였다. 공의 정신은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더 강하여 이따금 손님과 함께 밤중까지 술을 마시고도 닭이 울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혼자 일어나.. 더보기
이순신의 진성리더십 * 이 글은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 홈페이지(www.kleader.org)의 리더십 에세이 중 일부분입니다. 임진년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진성리더십 제장명(충무공리더십센터 교수) 올해는 임진년 7주갑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해에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의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해전 사례를 살펴보고 여기서 진성리더십의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최고 영웅입니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충효사상의 대명사, 훌륭한 인격자로서 조명되었지만 21세기에는 위대한 리더로 해전 승리의 비결, 이순신의 실체(진정성), 리더십의 발휘 등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총 49회의 해전 중 45회에 참전하여 40승을 이루고 다섯 번 무승부를 기록한 충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