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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처럼/이순신이야기

이순신의 진성리더십

* 이 글은 (사)한국형리더십개발원 홈페이지(www.kleader.org)의 리더십 에세이 중 일부분입니다.

임진년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진성리더십
 
제장명(충무공리더십센터 교수)
 
올해는 임진년 7주갑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해에 임진왜란에서 연전연승의 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의 해전 사례를 살펴보고 여기서 진성리더십의 해답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은 우리 민족의 최고 영웅입니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충효사상의 대명사, 훌륭한 인격자로서 조명되었지만 21세기에는 위대한 리더로 해전 승리의 비결, 이순신의 실체(진정성), 리더십의 발휘 등에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총 49회의 해전 중 45회에 참전하여 40승을 이루고 다섯 번 무승부를 기록한 충무공의 업적이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이 자리에서는 임진년에 있었던 해전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2차에 이은 3차 한산해전은 전략과 전술의 승리
이순신이 47세 되던 1591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배를 건조하고 방비 태세를 확립하는 차원에서 성곽과 봉화대를 보수하고 각종 무기를 정비하는 가운데 조정(비변사 결정)에서는 일본군 침입 시 육지에서 싸우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해전에 강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내린 지시였지요.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그때 당시 ‘성’ 싸움에 능숙했습니다. 100년 동안 봉건영주들끼리 권력싸움으로 육지에서의 싸움, 특히 성을 지키고 침공하는 전술이 뛰어난 상태였지요. 그러나 오히려 바다에서의 싸움은 해적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이순신은 이 점을 간파했습니다. “바다를 통해 칩입하는 적을 막는 데는 해전이 제일이라. 해군을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편성은 제1선병단 9개군 15 8700명을 비롯하여 제2선병단 8개군 10 2960, 수군 4개대 9200명 등 총 33만 명에 이릅니다. 먼저 제1선병단의 9개 군의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1번대 고니시군은 부산포에서 시작으로(4.13) 부산진성을 함락하고(4.14) 하루 만에 동래성을 무너뜨립니다(4.15). 이어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 상주, 조령, 충주(4.26)까지 열흘 만에 점령하고 경기도 여주를 지나 양근, 한양과(5.3) 개성, 평양(6.14)으로 약 두 달에 걸쳐 빠르게 이동합니다. 2번대는 가토군으로 부산포에 상륙해서(4.19) 충주에서 고니시군과 합류하여 한양을 거쳐(5.3) 함흥으로 이동합니다. 3번대는 안골포를 시작으로(4.19) 김해, 성주, 영동을 거쳐 한양에서 1번대를 지원합니다. 4번대와 7번대는 모리, 5번대는 시마즈, 6번대는 고바야 등을 중심으로 조선을 유린합니다. 
 
조선 육군이 패배를 거듭하는 가운데, 임진왜란 발발 20여일 만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첫 출정에 나섭니다. “곧바로 왜적의 소굴을 짓이겨서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나라의 부끄러움을 만분의 하나라고 씻고자 합니다. 성공과 실패, 잘되고 못 되는 것이야 신으로서는 미리 헤아릴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부원경상도장-경상도로 출전함을 밝히는 장계) 1차 출전은 옥포, 합포, 적진포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각각 적선 26, 5, 13척을 격침시킵니다.
 
2차 출정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으로, 이때 거북선이 큰 활약을 펼칩니다. 2차 출정 때 적선 76척을 침몰시키고 대승을 거두자 조정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왕이 승전 요인을 묻자 거북선의 전조 목적과 특징이 보고되면서 거북선이 유명해지기 시작합니다. 2차 출정의 승리 요인은 거북선을 이용한 전술과 조류를 이용한 작전 구사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적 대장선을 집중 공격하여 적의 사기를 꺽고 조선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하도록 한 것이 승리의 요인입니다. 무엇보다 2차출정의 의의는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연합하여 승리를 이루었다는 점이지요.
 
3차 출정은 한산해전이라 하는데(1592.7.8~7.10) 안골포 해전과 함께 한산대첩이라고 부릅니다.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 일본군이 나타났다는 목동 김천손의 제보로 받고 경상우수군과 전라우수군은 작전회의를 엽니다. 이때 원균이 무조건 쳐들어가자는 말에 이순신은 큰 바다로 유인하여 물리쳐야 한다는 작전구상을 밝힙니다. 원균이 이 전략을 받아들이면서 조선 수군은 아침 일찍 출정합니다. 이순신은 우선 5~6척의 배로 적군을 한산도로 유인한 후 학익진 대형으로 변환하여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이 진법은 해전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작전입니다. 학익진 신호는 처음엔 포를 쏘아 집중시킨 후 깃발을 좌우로 세 번씩 흔든 다음 북소리의 빠르기로 학익진 펼치는 속도를 알린 후 나팔로 공격을 지시합니다. 일본군의 73선 중 59척이 침몰되었고 뒤늦게 출정한 일본 배 14척만이 사태를 파악하고 도주하여 살아남게 되지요.
 
 
이순신은 눈물나도록 해군을 사랑한 장수였습니다.
그가 쓴 전투상황보고서를 보면 해군을 잘 활용해야 하며,
포’의 이동이 용이한 바다에서 일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소신이 확고히 나타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저는 그의 진정성을 봅니다.
 
 
안골포 해전은 장사진 형태로 공격하여 42척을 침몰시킨 해전입니다. 장사진은 뱀처럼 배가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공격 면을 최소화한 후 좌우로 돌면서 교대로 적선을 공격하는 전법입니다. 적의 지휘선과 대선 위주 격침을 함에 따라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순신 수군의 3차 출정 의의는 일본의 정예수군 세력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의 수륙병진전략이 분쇄되었고, 조선수군으로서는 반격의 교두보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해전의 영향으로 일본군은 이후 해전을 회피하는 전략을 고수하는데, 3차 출정은 그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산대첩은 행주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이면서, 살마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4차 부산포 해전 승리로 일본의 서진 의욕 좌절
조선 수군의 4차 출정은 원거리로 출정입니다. 부산의 일본 진영을 공격해야 하는 싸움이었기에 이순신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이 큰 해전이었습니다. 당시 부산포 앞바다에는 일본 배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선제공격으로 적선 100여척을 쳐부수는 등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군이 쏜 대통에 이마를 맞아 정운 장군이 안타깝게 전사합니다. 정운 장군은 언제나 선두에서 수군을 이끌었던 용맹스런 장군이었습니다. 정운 장군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크게 슬퍼합니다.
 
이 전쟁에 판옥선을 만든 정걸 장군도 출정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79세 노인이었습니다. 정걸은 이순신에게 자문도 하고 조방장 역할을 자청했는데, 이순신이 공을 세우는데 없어선 안 될 장수였습니다. 일화에 따르면, 정걸 장군이 정운에게 너무 용맹을 떨치려는 것보다 좀 뒤로 물러나 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만약 정운 장군이 정걸 노인의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죽음은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4차 출정의 의의는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승리함으로써 일본군이 서쪽으로 진격하려는 의욕을 미리 좌절시켰다는 점입니다.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130여 척을 잃음으로써 임진왜란 초기 전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군은 해전을 회피하고 해안가에 성을 짓는 등 전술상의 변화를 꾀합니다.
 
완벽한 준비, 소통과 인맥 중시한 이순신의 리더십 재조명해야
지금까지 임진년에 일어났던 이순신이 벌인 해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전쟁사례들을 통해 여러분께서 이순신 장군의 진정성과 리더십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순신의 리더십을 표현한다면 만전지계(萬全之計) 리더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순신은 전쟁에 임할 때에 기본적인 준비를 철저히 했고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신중하게 준비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특히 이순신은 소통을 많이 했던 장군이었습니다. 출동 여부와 작전들을 결정할 때 부하들과 사전회의를 통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상우수군 전라우수군의 지휘부와 원활히 협조하는 모습은 리더십 측면에서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은 정보를 중요시했고 정보를 잘 활용했습니다. 이 점도 이순신 해전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주위에는 그를 돕는 많은 파워인맥들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순신은 소통과 대인관계가 원만한 장수였습니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적군과도 소통하려 했고 육지의 조정 사람들과도 소통을 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의정 유성룡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한 것을 보면 그의 탁월한 인맥관리능력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순신의 파워인맥은 앞서 말한 것처럼 유성룡과 신구차를 써서 이순신을 구한 정탁 등 조정대신은 물론이고, 이순신과 동급 장수인 원균, 이봉수, 나대용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휘하 장수로는 전투에서는 유형과 송희립, 군수지원에서는 김완, 이봉수, 나대용, 행정에서는 정경달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이순신도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조정대신들과 부하장수들과의 원활한 소통, 그리고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목동 김천손의 보고에서 알 수 있는, 백성들과의 신뢰 형성은 이순신이 보여준 진성리더십의 실체이다.
 
이순신은 잘 키워낸 한명이 백 명의 적을 막는다는 말을 하며 우수한 인재를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수한 수군을 키워 놓으면 육군에서 빼가는 경우가 있어 종종 체찰사들과 마찰을 빚고 분개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이 쓴 전투상황보고서를 보면 눈물 나도록 해군을 사랑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해군을 잘 활용하여야 하고 일본군을 ‘포’의 이동이 용이한 바다에서 물리쳐야 한다는 소신, 즉 어떻게 해서든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저는 그의 진정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임진년 7주갑을 맞은 이 해에 이순신 리더십에 대해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제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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