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세종정치의 조력자, 소헌왕후 리더십

도성 화재때 위기 극복·민심 수습… 세종의 최고 조력자 소헌왕후

 

“세종이 진정으로 은애(恩愛)한 여인은 누구였나요?”

조선왕조에서 후궁을 제일 많이 둔 왕이 누구인지 묻는 분이 종종 있다. 세종을 염두에 두고 묻는 그분들에게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리곤 한다. 후궁을 가장 많이 둔 왕은 연산군이고(14명), 그다음이 성종이다(11명). 세종은 8명의 후궁을 두어 숙종과 함께 공동 5위다.

세종의 사랑을 받은 여인으로 먼저 떠오른 이는 신빈 김씨이다. 그녀는 궁궐의 여종 출신으로 세종의 눈에 띄어 6남 2녀를 낳고 정1품의 품계까지 받은 ‘세종시대의 신데렐라’다.

그런데 세종에게서 사랑은 물론 존경까지 받은 여인은 소헌왕후 심씨이다. 그녀는 1408년(태종8)에 두 살 연하의 세종과 혼인한 후, 남편으로부터 “품성이 덕스럽고 부드러우며, 아름답다(德柔嘉)”는 자랑을 들으며 살았다. “마음가짐이 깊고 고요한(宅心淵靜)” 여성이며 “스스로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自飭)” 분이라고 칭찬받기도 했다. 정인지가 쓴 ‘영릉지(英陵誌)’를 보면 세종은 “왕비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면 반드시 일어서서 맞이하고 배웅했다(後之進退 殿下必起立)”고 한다.

세종은 왜 이처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공경했을까? 그 이유의 하나는 그녀가 왕비의 역할을 잘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매양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라는 세종의 말처럼, 소헌왕후는 다방면으로 세종의 정치를 도왔다. 예컨대 그녀는 양로연(養老宴)을 열어 나라의 노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곤 했다. 그 대상은 사대부의 아내로부터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왕비의 양로연 행사가 처음 시작된 1432년(세종14) 이후 소헌왕후는 무려 1192명의 여자 노인을 경복궁 사정전에 초대해 잔치를 베풀고 무병장수를 빌었다.

 

그뿐 아니다. 소헌왕후는 백성들이 슬퍼하는 일에도 함께했다. 명나라에 공녀(貢女)로 떠나는 처녀들과 그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주었다.

국왕이 남자 노인들에게 정성껏 양로연을 베푼 하루 이틀 뒤에 왕비가 똑같은 공간(사정전)에서 여자 노인들에게 잔치한 사실은 어른을 공경하는 유교 국가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가령 양로연에 참석한 이귀령이라는 89세 된 노인은 “비로소 양로의 예(禮)를 일으켜서 노인을 우대하시니 심히 거룩한 일”이라면서, 특히 “예악을 제작하여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밝게 갖춘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소헌왕후의 왕비 리더십이 가장 돋보인 것은 세종 초반의 도성대 화재사건 때다. 재위 8년째가 되던 1426년 2월 당시 세종은 강원도 횡성에서 강무(講武) 중이었다. 도성에는 왕비만이 몇몇 대신들과 남아 있었다. 실록을 보면, 이날 도성 건물 4분의 1이 연소되고 32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통상 이러한 국가비상 상황에서는 정승이나 병조판서 등이 나서서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병조판서 조말생은 국왕과 함께 횡성 강무장에 있었고, 순찰 책임자인 한성부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정승들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조정의 무대응과 무대책을 떨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임신 7개월의 소헌왕후였다. 왕비는 도성에 있는 모든 대신과 관리에게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주었다. 재물(돈과 식량)과 국가 상징(종묘와 창덕궁)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후자를 택했다. 건국한 지 30여 년밖에 안 된 나라가 국가 상징을 상실할 경우 민심을 추슬러 가며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급거 상경한 세종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앞으로 긴급한 일이 생기면 (왕이 있는) 행재소로 달려와 아뢰지 말고, 중궁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라(承中宮之命 施行)”는 왕의 신뢰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717010324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