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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종리더십의 저력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는 독서력

하늘의 이치 꿰뚫는 고전 독서력… 中황제도 설득할 수 있는 힘

 

“청와대 경호실에서 22층 건물을 17층으로 자르라고 합니다. … 저는 이 나라와 각하, 그리고 법의 권위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가 합법적으로 쌓은 사옥을 자르라면 건물을 자르는 대신 죽을 각오로 부당함에 맞서겠습니다.”

1979년 봄 광화문 교보빌딩이 완공될 즈음, 교보생명 설립자 신용호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경호’를 이유로 다 지어진 건물의 층고를 낮추라는 청와대 경호실의 고위 간부의 압력에 대해 신 회장은 “옛 선비들이 죽을 각오를 하고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렸던 심정으로” 위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신 회장의 편지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세종 때 편찬된 책 ‘삼강행실도’를 떠올렸다. 효자·충신·열녀 사례 105개를 엮은 이 책의 대다수가 윗사람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간언(諫言)으로 바로잡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의 첫 번째가 효자 민손의 사례인데, 민손은 자기를 미워하고 차별 대우한 새어머니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이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새어머니와 배다른 동생들이 얼어 죽을 것이니 부디 아버지께서 생각을 바꿔 주시라고 간언했다.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옳은 말로 간청하는 그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물론이고 새어머니까지 감동했다.

충신도의 첫 번째 사례인 하나라의 충신 관용방(關龍)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걸(桀) 임금에게 “고칠 것”을 간언하다 목숨을 잃었다. 고려 말의 충신 이존오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그는 공민왕의 스승을 자처하며 왕과 나란히 앉은 신돈을 크게 꾸짖어 의자에서 급히 내려오게 만들었다. 성난 임금 앞에서 파직과 투옥을 겁내지 않고 용감하게 직언했다.

 

나는 신 회장이나 ‘삼강행실도’에 실린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궁금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죽음이나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그런 언행을 하게 만들었을까? 심리학자 브루노 베텔하임에 따르면 어린이는 동화를 들으면서 도덕적 행위의 귀중함을 깨닫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옛이야기는 상황을 단순화하는 특징이 있는데, 어린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악행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의 경우 청소년 시절의 ‘천일독서’가 청와대의 부당한 압력에 맞서는 저력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구해 준 고전들을 읽으며 감수성과 상상력을 계발했고, 위인전과 철학 서적을 3년(1000일)가량 침잠해 읽으면서 ‘옳은 것이 마침내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독서를 통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은 세종의 생각이기도 하다.


재위 9년째인 1427년에 자신의 학습법이라면서 세종은 고전 속의 ‘통찰력 있는 말이나 잘한 정치의 사례(嘉言善政)를 반복해서 듣는 것’의 힘을 강조했다.

점심 무렵부터 저녁 시간에 이르기까지 스승들에게 고전 속 이야기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서 몸에 익숙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 독서의 목표는 그저 아름다운 말과 성공 사례를 암기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학습 목표는 하늘의 이치를 깨우치는 것이었다.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는(代天理物) 존재인 왕은 당연히 계절의 순환을 반복하는 하늘처럼 변치 않고 굳건한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보편 논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자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때론 중국 황제까지도 설득할 수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최고 권력자에게 편지를 보내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았던 교보 설립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안의 북극성’을 발견하게 하는 독서의 힘을 새삼 깨달았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6260103243000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