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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처럼/정조이야기

정조대왕의 시(詩)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권 詩

가가 교외 길을 안온하게 돌아와     / 穩旋郊駕路
군재의 동쪽에 임해서 주필하였네      / 臨蹕郡齋東
술동이에는 푸른 거품이 출렁이고      / 樽漾蟻浮綠
과녁판에는 붉은 곡이 걸려 있도다     / 帿懸鵠中紅
일천 민가엔 밥 짓는 기미가 보이고    / 千家烟火氣
여러 진영엔 북 피리 소리 울리누나    / 列壘鼓笳風
한 번 즐김이 어찌 법도가 되었으랴    / 一豫寧爲度
금년에 다행히 풍년을 만났음일세      / 今年幸遇豐

고양군(高陽郡)에 행차하여 유신(儒臣)들에게 무예를 시험하였다. 고양군에 사정(射亭)이 있으므로, 어가(御駕)를 수행한 문무(文武) 근신(近臣)들과 함께 곡(鵠)을 쏘았으니, 이는 곧 선조(先朝) 시대 성대한 행적의 일단을 계술한 것이라 기록이 없을 수 없으므로, 후일에 이것을 읊다.
이날 내가 소곡(小鵠)을 쏘아 다섯 번을 맞혔고, 본도의 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네 번을 맞혔으며, 병조 판서 이갑(李)이 한 번을 맞혔고, 별운검(別雲劍) 서유린(徐有隣)은 두 번을 맞혔으며, 이문원(李文源)ㆍ박우원(朴祐源)은 한 번을 맞혔고,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는 과녁을 지나쳤다. 금위대장 서유대(徐有大)는 세 번을 맞혔고, 직제학 이병모(李秉模), 검교직각 서정수(徐鼎修)는 과녁을 지나쳤다.
대교 윤행임(尹行恁)은 두 번을 맞혔고, 도승지 심풍지(沈豐之)는 과녁을 지나쳤다. 좌승지 이시수(李時秀)는 한 번을 맞혔고, 별군직(別軍職) 이득제(李得濟)는 과녁을 지나쳤다.
이한풍(李漢豐)은 한 번을 맞혔고, 이윤빈(李潤彬)은 세 번을 맞혔으며, 이유경(李儒敬)은 두 번을 맞혔고, 유효원(柳孝源)은 세 번을 맞혔으며, 한광제(韓光濟)는 한 번을 맞혔고, 박기풍(朴基豐)은 세 번을 맞혔으며, 이석(李晳)은 두 번을 맞혔고, 오의상(吳毅常)ㆍ김희(金爔)ㆍ서영보(徐英輔)는 세 번을 맞혔으며, 정학경(鄭學畊)ㆍ임성열(任聖說)은 두 번을 맞혔고, 승전 선전관(承傳宣傳官) 김익빈(金益彬)은 두 번을 맞혔으며, 양협(梁埉)은 한 번을 맞혔고, 이신경(李身敬)ㆍ이광익(李光益)은 두 번을 맞혔으며, 이형수(李馨秀)는 한 번을 맞혔고, 차사원(差使員)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태영(李泰永)은 네 번을 맞혔으며,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행원(尹行元), 양주 목사(楊州牧使) 홍의영(洪義榮)은 과녁을 지나쳤다.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인묵(洪仁默)은 한 번을 맞혔고,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관현(李觀賢),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소(李素)는 과녁을 지나쳤다.
제신(諸臣)의 활쏘기를 마치고 나서 완사례(完射禮)를 거행한 것은 또한 고사(故事)이다.
내가 또 활을 쏘아 다섯 번을 맞혔고, 방백(方伯)이 세 번을 맞혔다.
그리고 곡(鵠)은 군사(郡舍)에 쟁여 두었으니, 이 또한 육일각(六一閣)에 후(帿)를 쟁여 두었던 성의(聖意)를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