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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처럼/정조이야기

화성 건설의 공사 보고서 <화성성역의궤>

화성 건설의 공사 보고서 <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화성의 축조 공사는 1794년(정조 1) 1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공사가 끝난 1796년 9월부터 의궤를 편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의 주요 행사가 끝나면 이내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고 의궤를 편찬했던 기왕의 관례를 따른 조치였다. 화성성역의궤는 일단 그 해 11월 9일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80만냥이란 거금을 투입한 대공사의 종합 보고서였으므로,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또한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대, 그 중에서도 가장 전성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 만들어진 책이므로 그 내용이 상세하고 치밀한 것이 특징이다.
  화성성역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하여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화성성역의궤의 체제를 설명한 범례, 화성을 건설하고 의궤를 편찬하며 인쇄하는데 참여한 인원 명단, 그리고 도설(圖說) 즉 그림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화성의 전체 모습을 그린 화성전도(華城全圖), 화성의 4대문, 비밀 통로인 암문(暗門), 횃불을 올려 신호를 주고받았던 봉돈(烽墩) 등 성벽에 설치된 모든 시설물들의 세부도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또한 화성행궁, 사직단,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함), 영화역(迎華驛) 등 화성 주변의 건물이나 시설의 그림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975년에 정부에서 화성 성곽의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3년 만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그림의 설명에 힘입은 바 컸다.
  이외에도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성을 쌓는데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에게 준 상품, 각종 의식의 절차, 공사 기간 중 관련 기관 사이에 오간 공문서, 장인들의 명단, 소요 물품의 수량과 사용내역, 단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특징은 철저한 기록정신이다. 장인들의 명단에는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의 기술자 명단이 석수, 목수, 니장(泥匠, 흙을 바르는 기술자), 와옹장(瓦甓匠), 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기술자), 화공(畵工) 등 직종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보면 최무응술(崔無應述),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 등과 같이 하급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며,이름 밑에는 근무한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하여 임금을 지급했다. 국가의 공식 기록에 천인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특이하지만, 이들의 작업량을 세밀히 정리하여 일일이 품삯을 지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성의 역사(役事)에는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박지원, 박제가는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학자인데, 이들이 청에서 도입하자는 문물 중에는 벽돌이 포함되어 있었다. 벽돌은 견고하여 오래 견딜 뿐만 아니라 규격이 일정하여 작업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화성의 4대문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은 벽돌을 사용하여 짓고, 성벽의 몸체는 종래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화성의 건설에는 또한 과학적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기계도 큰 몫을 하였다. 특히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擧重器)는 움직이는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성곽 공사에 필요한 무거운 돌을 효율적으로 운반했다. 거중기와 함께 고정 도르레를 이용한 녹로(轆轤)와 유형차라는 수레도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이처럼 화성은 18세기 후반 이후 새롭게 수용된 과학 사상을 수용하는 시험장 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정조 실록 아카데미> 건국대 신병주 교수 특강 자료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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