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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세종왕비, 소헌왕후가 보여준 온유함의 힘

소헌왕후 정신적 外傷 극복 비결은, 외조부 큰 사랑· 남편 세종 신뢰

 

“소헌왕후는 어떻게 그렇게 부드러우면서도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갖게 됐나요?”

여주에 있는 ‘진달래길’, 즉 세종영릉 근처에 있는 진달래 숲길을 걸을 때 어느 분이 한 질문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이 여주로 옮기게 된 과정과 조선왕조에서 왕비의 위상과 역할, 그리고 지난주 칼럼에 쓴 도성 대화재사건 때 소헌왕후가 발휘한 리더십 사례는 이곳 답사 코스에서 꼭 들려드리는 이야기다.

이런 질문, 즉 어떻게 그런 인물이 됐느냐는 물음은 대답하기가 녹록지 않다. 결과로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야 하고, 현상의 이면까지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과 ‘열성후비지문’ 등 관련 자료를 샅샅이 살펴봤다. 그 결과 소헌왕후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남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두 달간의 짧은 영화(榮華)를 누렸지만, 곧바로 친정 가문이 풍비박산되는 아픔을 겪었다. 왕비가 된 지 4개월째인 1418년 12월에 친정아버지 심온이 ‘강상인 옥사’에 연루돼 죄인으로 사망했고, 친정어머니 안씨는 천인으로 전락했다. 자신도 자칫 폐비(廢妃), 즉 왕비 자리에서 밀려나고 이혼까지 당할 뻔했다. 이후 그녀는 평생 ‘죄인의 딸’이란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삼가면서(戒飭)” 자녀를 교육하고 왕실을 화목하게 만들었다. 특히 도성 대화재사건이 발생했을 때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국왕과 신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세종 재위 24년째인 1447년 봄, 나이 90이 넘은 할머니가 길가에 나와 인사드리고 ‘자기 여종을 왕비에게 바쳐 섬기게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리더십의 관점에서 볼 때 소헌왕후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맡은 바 책무를 다하는 책임감 있는 리더였고, 위기를 잘 극복하는 지도자였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뛰어난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소헌왕후가 젊은 시절 커다란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추스르고 책무를 다하는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에게 받은 큰 사랑이 있었다. 그녀를 유난히 예뻐한 사람은 외할아버지 안천보(安天保)였다. 안천보는 고려 말 잠깐 벼슬을 했으나 곧 면직당하고 경기도 양주(楊洲)의 사저(私邸)에서 가야금과 책을 벗 삼아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그즈음 첫 번째로 태어난 외손녀 소헌왕후를 그는 무조건적으로 믿고 지지했다고 한다. “왕비는 어려서 외조부 안천보의 집에서 나고 자라서 (외조부와의) 은의가 지극히 두텁다”고 세종이 말할 정도였다. 특히 세종은 ‘죄인이자 노비 신분인 심온의 처 안씨를 왕비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헌왕후를 안천보의 집으로 보내 왕비의 친정 가족들이 해후하게 하기도 했다.

소헌왕후가 ‘정신적 외상(外傷)’을 겪은 후에도 오히려 더욱 성장할 수 있었던(Post-Trauma Growth) 두 번째 요소는 남편 세종의 신뢰였다. 세종은 1408년 두 살 연상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시종 공경과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비가 “매우 유순할(極柔)뿐더러 언행이 훌륭하다”고 말하곤 했다. 왕비 가문이 몰락한 다음에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왕비를 가까이했다. ‘강상인 사건’ 이후에 왕비와의 사이에서 다섯 아들이 태어난 것이 그 증좌(證左)다.

의심과 불화, 비난으로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세종영릉의 진달래길 - ‘소헌길’로 개칭하면 더욱 좋을 듯 -을 걸으며 소헌왕후 이야기를 만나길 추천한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박현모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72401032430000001